이 세상에서 너의 묘사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걷기로 했어


-  바다가 보이는 주유소」 부분

-  김이강, 타이피스트42p


      


1809 시밤_세 번째 모임


김이강  타이피스트 

유진목  식물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데 유독 시가 읽히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쯤에서 시를 읽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도 싶었다. 시를 읽는 것이 뭐라고 이렇게 괴롭나 싶어서. 

숙제를 다 끝내지 못한 사람의 심정으로 나간 시밤의 세 번째 모임.


유진목 시인의 식물원 에는 20페이지 가량 70년대(?) 흑백 사진들이 담겨있다. 

어떤 이의 사진인지 모를 그것들이 시집에 담겨있으니 오히려 시를 읽는데 방해가 되었다거나, 

의도를 당최 알 수 없으니 페이지가 아까웠다거나 하는 말들이 오갔다.  

그래도 그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개인적 경험들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나는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김상혁 클럽장님은,


"주제(사진)를 던져놓고 추리해보는 일 자체가 시적 경험이며, 정답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 말씀 해주셨다. 



그는 여러 번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한번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한번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0 부분

-  유진목, 식물원」, 84p


모임이 끝나고 모두가 칭찬을 한 유진목 시인의 연애의 책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것은 김이강의 시집이었던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인의 말'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수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판을 지나 걷는다.

아주 단순하게

끝없이 걸어가는 일


등신대(等身大)로 살아간다는것.

평평하다는 건 그런 걸까.


-김이강 「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기록용, 세 번째 독후감---------------------------------------------------


다만 춥고 비가 내려서


11월, 가을이 한 뼘 더 멀어진다. 책을 읽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라는데 시는 좀처럼 읽히지 않았고, 다만 춥고 비가 내렸다. 


유진목 시인의 시를 읽는 내내 남성의 목소리로 읽혔다. 중저음의 어디인지 모르게 서리하면서도 슬픈.

시를 어느 정도 읽고서야 여성 시인인 것을 알게 됐는데 그런데도 시집 곳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쯤 되니 그게 뭐 중요할까 싶었다.

게다가 숫자로 된 제목이 전부인 줄 알았다. 책장 끄트머리의 단어들을 놓친 채 반 이상 읽어버렸는데,

그건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해 다시 읽었지만 나무의 생김새를 애써 찾아보지는 않았다. 멋대로 읽어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기막히게 오독을 했다고 생각해버리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래서인지 사진들을 보거나 시구를 읽고 생각나는 것들을 생각나게 내버려 뒀다. 

예를 들어, '시인은 이름에 나무 목을 쓰나? 이름에 나무 목자가 들어간 사람의 인생은 어떨까. 그래서 나무의 이름들이 가득한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걸까. 매미같이 운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는 정말 1998년 여름의 끝에서 죽었을까. 정말 망설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아차차, 맹그로브 사이를 걸어가던(헤엄치던) 외국인이 기억난다. 그 사람은 죽었을까. 맹그로브가 되었을까. 나도 쇠 쇠하고 울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는 나는 몇 번의 생을 살았을까. 고양이는 아홉 번을 산다는데 나는 그것보다 많을까 적을까. 태어나자마자 죽은 때도 있었을까. 한 번은 나무로 살았던 적도 있을까. 전생의 그리운 이가 떠올라 울다가 까무러치기도 했을까.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을 보면 나는 이번이 첫 번째 생일까. 몇 번의 생을 반복해야 "살아가는 일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만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올까. 마지막 장인데 이걸 끝으로 내 생애도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것들. 

쓸데없지만 쓸데없어서 의미있을지도 모를 생각의 부스러기들이 유진목의 시를 읽는동안 여기저기 흩어졌다. 

제멋대로 읽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모임 후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 다시 읽어보자고 생각했다.




1809 시밤_두 번째 모임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문보영 <책기둥>



모임 때마다 사진으로 기록해와야지 해도

이야기하느라 듣느라 시간을 허투루 쓸 수가 없다. 

분명 서너 장은 찍어온 것 같은데 찾아보면 없는....


'이런 게 현대시구나' 시알못인 내게 읽는 재미를 던져준 문보영의 <책기둥>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든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무려 작년의 일이므로

클럽장님의 가르침으로 급 마무리. 


"줄거리에서 벗어나고 인과관계에서 탈피하는 것이 현대시를 읽는 법 중의 하나"


시밤은 격렬한(?) 북토크를 마치고, 어떤 시집이 더 좋았는지 투표를 한다. 

난해하고 어렵게 읽힐까봐 걱정했다는 클럽장님의 우려와는 다르게

<책기둥>을 선택한 이가 많았다. 나 역시도.



아래는 기록용, 제출 독후감 ----------------------------------------------------------------------------------------


문보영의 <책기둥>을 읽고



풍선 안으로 이쑤시개 넣기


터질 것 같이 빵빵하게 부푼 풍선 안으로 이쑤시개를 넣을 수 있을까. ‘보나 마나 터지겠지’ 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보나 마나 뻔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뻔하지 않다. 이쑤시개 꽂을 부분(정확히는 풍선 매듭의 부근)을 잘 선택하면 뾰족한 그것을 몇 개든 풍선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보고도 쉽게 믿기지 않으므로 마술이라고도 불린다는데, ‘성공적으로’ 이쑤시개를 품고 있는 풍선이 마치 문보영 시인의 <책기둥>의 시적 화자들 같다고 생각했다. 

모양새만을 보고 “(영락없는) 풍선이네.” 하며 섣불리 판단하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뾰족한 그것들이 보이는 방식으로, <책기둥>의 시적 화자들은 ‘내게도 박힌 이쑤시개가 몇 개쯤은 있지’라고 태연히 내뱉는 것 같았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뾰족하고 슬픈 것들을 ‘아무튼’ 느끼게 하는.

해석하려는 자세로 시를 읽는 것이 '시의 존재’ 만큼이나 무용하다는 것을 책기둥을 통해 조금 알아낸 것도 같다. 해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굳이 해석을 더해 의미 있고 완결된 이야기로 만들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꼭 그렇게 다물려지지는 않는 기묘한 이야기의 전개이다". 해설을 읽고 나서 목 부근까지 잠긴 셔츠 단춧구멍 하나쯤 푼 기분으로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암호 같은 시어들을 여전히 해독하고 싶은 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벽을 해명하는 데 일생을 거는 벽"이 되거나, "브래지어가 없는 F"가 되어버리는 체험을 이따금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코 아래 입술이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수상해 하기도 했고, "슬퍼하지 않은 것도 슬퍼한 것의 일부가 되는 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또 이따금 다른 이에게 느꼈던 마음이라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50억 배 확대해 보고야 마는 나쁜 마음"이었다는 슬픈 진실도 깨닫게 됐지만 동시에 저릿한 해방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제멋대로 고유명사도 되었다가 부사나 동사가 되어보기도 하면서 점점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쉽기만 했던 시집이다. 

이렇게 쓰고도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 글로는 좀처럼 정리될 것 같지 않다. 그 핑계 삼아 옆에 두고 오래오래 읽고 싶다. 

참 그러고 보니 내 애인도 뇌를 두고 떠났는데, 그는 알까. 서로의 비스킷 씹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헤어진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밧줄이었다는 것을.



남산타워를 찍은 어제부로, 걷기 코스를 바꾸었다. 


가파르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코스지만,

그만큼 운동 다운 운동을 하는 느낌이 든다.


새로운 코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별안간 엄마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우리 이제 이렇게 해보자.

-뭘?

-마주치는 사람한테 인사하기.

-난 외국 나가면 그러는데, 한국에선 뭔가 겸연쩍어.

-엄만, 앞으로 그렇게 할 거야. 인사할 거야.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러고는 대여섯 명을 길에서 마주쳤다.

엄마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나도 뒤따라가며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안부 인사가 부담스럽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해주는 사람.

"안녕하세요"라고 답해주는 사람이 우리를 지나쳤다. 


-저 사람들도 아침에 인사받는 게 어색한 거야.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산을 내려올 때는 인사를 하지 않는 거다.


-엄마, 왜 인사 안 해.

-까먹었어.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엄마도 민망했나 싶었다. 


그러다가 집 근처 와서는,

슈퍼 문을 여는 직원에게 별안간 큰소리로 안부를 건네는 것이다.

직원이 당황한 듯(표정 어쩔....) 고개를 돌리며 얼떨결에 인사를 받는다.


-인사를 뭘 그렇게 크게 해. 

-수그리고 있어서 못 들을까 봐.

-동네 사람들 다 깨우겠네.


오늘 엄마가 안부를 건넨 사람들은 안녕한 하루를 보냈을까. 


앞으로도 엄마의 인사하기는 계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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