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서른 살 」 부분

진은영,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23p




박상순 「 Love Adagio 

진은영 「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연말 약속이 많은 12월이라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시즌을 돌아보며 오고 간 이야기들이 좋았다. 

더불어 모임에서 영업을 제대로 당해 박상순의 팬이 되었으므로

그의 시집을 모조리 모아보자(읽어보자) 다짐도 했다. 


그리고,

다음 시즌 첫 모임을 기다리고 있다. 두근두근




정리의 의미로, 


+ 트레바리 클럽장 모임이 비싼 이유를 말해보자 (개인적인 느낌적인 느낌...)


사실 시를 읽는 모임이 있다는 것만으로, 

게다가 시인 님이 모임을 같이 한다는 사실 만으로, 나는 조금 기뻤다. 


트레바리 이전에 3년 정도 독서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의지도 많이 했고, 친목의 성향도 강해서 독서 모임 외에 놀러도 많이 다녔다. 

그러나 책을 위한 모임에서 대화가 더 깊어질 수는 없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제일 얕았으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중심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말하고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배워가는 것도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트레바리 클럽장 모임이 그랬고, 시밤이 그렇다. 



시밤이 클럽장 모임이라 좋은 이유는, 


1. 시를 해석하는 방법이 아니라 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클럽장님은 박상순 시인의 시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박상순의 시를 읽다 보면 이유도 모른 채 울컥할 때가 있다. 좋은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지만 좋다. 공감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시가 좋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해석도 이유도 모르겠지만 좋은 것, 마음을 조금은 흔들어 놓는 것, 그 자체가 시를 읽는 이유가 아닐까라고.



2. 시와 시인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씹을만한 가십거리가 아니라, 시인이 작업하는 방식이나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힌트를 얻는 경우가 많다. 듣고 나서야 이해가 되는 시들도 있어서, 매번 이야기 듣는 것이 즐겁다. 



물 위의 암스테르담 


아빠는 두려워서 가지 못한단다

아들아, 딸아! 너희들이 대신 갈 수 있겠니?


물 위의 암스테르담

아직 열세 살인 너희들의 엄마가 있고, 

아직 아홉 살인 너희들의 아빠가 있고

죽은 기린이 있고, 죽은 코끼리가 있고, 죽은 앵무새

가 있고


죽어서도 어여쁜, 꽃들이 있고

죽어서도 떠다니는 연인들의 벌거벗은 몸이 있고


아빠가 타고 온 배들이 있고

아빠가 끌고 온 해일이 있고

아빠가 들고 온 폭풍이 있고

사람이 있고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고, 아빠가 만든 사람이 있고,

아빠가 무너뜨린 사람이 있고

아직 스무 살인 엄마가 있고, 아직 마흔 살인 엄마가 

있고


죽어서도 어여쁜, 꽃들이 떠다니는

죽어서도 슬픈 별들이 떨어지는

물 위의 암스테르담, 떠다니는 진화의 유체(流體)

아들아, 딸아! 너희들이 갈 수 있겠니?

아빠는 무서워서 가지 못한단다


아빠 대신 갈 수 있겠니. 갈 수 있겠니

그래도 한번쯤은 엄마에게 말해 줄 수 있겠니  



박상순, 「 Love Adagio , 39-40p


이 시가 특히 그랬다. 

임신 중절이 불법이었던 때에 몰래 아이를 지우기 위해 

암스테르담까지 배를 타고 건너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혼자 읽을 때는 읽고 그냥 지나친 시였는데,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몇 번을 다시 소리 내어 읽어보게 되었다. 






기록용. 네 번째 독후감 ========================================================



#1 나의 푸른 봄은 어디쯤에서 손을 흔드나

-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읽고,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 서성거렸다

...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 언제나 가뭄이었다


<청춘 1> 부분


맞아 죽고 싶습니다 / 푸른 사과 더미에 / 깔려 죽고 싶습니다


<청춘 2> 부분


사이 만을 돌아다니던 때와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던 때. 진은영 시인의 청춘 1과 청춘 2가 쓰인 시간의 간격을 알고 싶었다. 

나 또한 늘 가뭄이어서 알맞게 영글어본 적 없던 때가, 무엇으로든 맞아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으므로. 몹시도 궁금했다. 시인의 청춘 연작시는 어디쯤에서 뒤를 돌아보며 썼는지.

아라공의 말처럼 어느 즐거운 저녁때 돌아본 청춘의 모습이 보기 어땠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시를 읽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은 나의 어느 시절일까도 생각하며 읽게 됐다.


봄에서 여름이 가고, 가을도 지나고, 겨울에서 다시 봄이 된 어느 한 시절을 기억한다. 그 시절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내가 있고, 네가 있었고, 조용하면서도 소란스러운 적막 가운데 서로의 발의 리듬을 맞추어 보던 때를 기억한다. 그때를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으므로,

즐거운 저녁때가 아니더라도 공들여 돌아보는 장면이다. 그 시절, 여전히 나는 가뭄이었고, 서성거렸고,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왜인지 그것들은 휘발되고 스스로도 부러운 청춘의 모습으로만 남았다. 


청춘의 연작시가 4개나 있는 것을 보면, 진은영 시인의 청춘도 하나의 모습, 하나의 시절은 아닐 터, 오늘의 나는 또 어느 미래의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일까.



#2 내가 여기 있다고

-박상순의 < Love Adagio >를 읽고,


<창밖에>


창밖에 네 사람이 서 있다 / -그해 봄에, 그해 봄에 / 나는 연인 곁에서 길을 잃었다 /

창밖에 세 사람이 서 있다 / -그해 여름에, 그해 여름에 / 나는 연인 곁에서 길을 잃었다 / 

창밖에 두 사람이 서 있다 / - 그해 가을에, 그해 가을에 / 나는 연인 곁에서 길을 잃었다 / 

창밖에 한 사람이 서 있다 / - 그해 겨울에, 그해 겨울에 / 나는 연인 곁에서 길을 잃었다 /


창밖에 사람들이 서 있다가 사라졌다. 내가 지금 밖으로 나가더라도 그들을 마주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봄이 지나고,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 가도록 내게 일어난 일, 창밖의 풍경이 점점 비워져 간다는 것. 게다가 4계절을 보내는 내내 나는 옆에 연인을 두고도 길을 잃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면 창밖에는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조차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좌표를 상실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이 하나 없는 세계에서 내가 여기 있다고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박상순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줄곧 달아나거나 사라진다. 자기를 장면에서 지우는 방식으로 내가 한때나마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를 읽으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도대체 무엇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 앞에서 또 길을 잃는 심정이 되었다. 아주 긴 인생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들여 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 세상에서 너의 묘사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걷기로 했어


-  바다가 보이는 주유소」 부분

-  김이강, 타이피스트42p


      


1809 시밤_세 번째 모임


김이강  타이피스트 

유진목  식물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인데 유독 시가 읽히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쯤에서 시를 읽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도 싶었다. 시를 읽는 것이 뭐라고 이렇게 괴롭나 싶어서. 

숙제를 다 끝내지 못한 사람의 심정으로 나간 시밤의 세 번째 모임.


유진목 시인의 식물원 에는 20페이지 가량 70년대(?) 흑백 사진들이 담겨있다. 

어떤 이의 사진인지 모를 그것들이 시집에 담겨있으니 오히려 시를 읽는데 방해가 되었다거나, 

의도를 당최 알 수 없으니 페이지가 아까웠다거나 하는 말들이 오갔다.  

그래도 그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개인적 경험들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나는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김상혁 클럽장님은,


"주제(사진)를 던져놓고 추리해보는 일 자체가 시적 경험이며, 정답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 말씀 해주셨다. 



그는 여러 번 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한번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한번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0 부분

-  유진목, 식물원」, 84p


모임이 끝나고 모두가 칭찬을 한 유진목 시인의 연애의 책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것은 김이강의 시집이었던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인의 말'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해수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판을 지나 걷는다.

아주 단순하게

끝없이 걸어가는 일


등신대(等身大)로 살아간다는것.

평평하다는 건 그런 걸까.


-김이강 「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기록용, 세 번째 독후감---------------------------------------------------


다만 춥고 비가 내려서


11월, 가을이 한 뼘 더 멀어진다. 책을 읽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라는데 시는 좀처럼 읽히지 않았고, 다만 춥고 비가 내렸다. 


유진목 시인의 시를 읽는 내내 남성의 목소리로 읽혔다. 중저음의 어디인지 모르게 서리하면서도 슬픈.

시를 어느 정도 읽고서야 여성 시인인 것을 알게 됐는데 그런데도 시집 곳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쯤 되니 그게 뭐 중요할까 싶었다.

게다가 숫자로 된 제목이 전부인 줄 알았다. 책장 끄트머리의 단어들을 놓친 채 반 이상 읽어버렸는데,

그건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해 다시 읽었지만 나무의 생김새를 애써 찾아보지는 않았다. 멋대로 읽어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기막히게 오독을 했다고 생각해버리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래서인지 사진들을 보거나 시구를 읽고 생각나는 것들을 생각나게 내버려 뒀다. 

예를 들어, '시인은 이름에 나무 목을 쓰나? 이름에 나무 목자가 들어간 사람의 인생은 어떨까. 그래서 나무의 이름들이 가득한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걸까. 매미같이 운다는 것은 어떤 걸까. 그는 정말 1998년 여름의 끝에서 죽었을까. 정말 망설이는 사람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아차차, 맹그로브 사이를 걸어가던(헤엄치던) 외국인이 기억난다. 그 사람은 죽었을까. 맹그로브가 되었을까. 나도 쇠 쇠하고 울었던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는 나는 몇 번의 생을 살았을까. 고양이는 아홉 번을 산다는데 나는 그것보다 많을까 적을까. 태어나자마자 죽은 때도 있었을까. 한 번은 나무로 살았던 적도 있을까. 전생의 그리운 이가 떠올라 울다가 까무러치기도 했을까.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을 보면 나는 이번이 첫 번째 생일까. 몇 번의 생을 반복해야 "살아가는 일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만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올까. 마지막 장인데 이걸 끝으로 내 생애도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것들. 

쓸데없지만 쓸데없어서 의미있을지도 모를 생각의 부스러기들이 유진목의 시를 읽는동안 여기저기 흩어졌다. 

제멋대로 읽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모임 후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 다시 읽어보자고 생각했다.




1809 시밤_두 번째 모임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문보영 <책기둥>



모임 때마다 사진으로 기록해와야지 해도

이야기하느라 듣느라 시간을 허투루 쓸 수가 없다. 

분명 서너 장은 찍어온 것 같은데 찾아보면 없는....


'이런 게 현대시구나' 시알못인 내게 읽는 재미를 던져준 문보영의 <책기둥>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든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으나, 무려 작년의 일이므로

클럽장님의 가르침으로 급 마무리. 


"줄거리에서 벗어나고 인과관계에서 탈피하는 것이 현대시를 읽는 법 중의 하나"


시밤은 격렬한(?) 북토크를 마치고, 어떤 시집이 더 좋았는지 투표를 한다. 

난해하고 어렵게 읽힐까봐 걱정했다는 클럽장님의 우려와는 다르게

<책기둥>을 선택한 이가 많았다. 나 역시도.



아래는 기록용, 제출 독후감 ----------------------------------------------------------------------------------------


문보영의 <책기둥>을 읽고



풍선 안으로 이쑤시개 넣기


터질 것 같이 빵빵하게 부푼 풍선 안으로 이쑤시개를 넣을 수 있을까. ‘보나 마나 터지겠지’ 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보나 마나 뻔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뻔하지 않다. 이쑤시개 꽂을 부분(정확히는 풍선 매듭의 부근)을 잘 선택하면 뾰족한 그것을 몇 개든 풍선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보고도 쉽게 믿기지 않으므로 마술이라고도 불린다는데, ‘성공적으로’ 이쑤시개를 품고 있는 풍선이 마치 문보영 시인의 <책기둥>의 시적 화자들 같다고 생각했다. 

모양새만을 보고 “(영락없는) 풍선이네.” 하며 섣불리 판단하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뾰족한 그것들이 보이는 방식으로, <책기둥>의 시적 화자들은 ‘내게도 박힌 이쑤시개가 몇 개쯤은 있지’라고 태연히 내뱉는 것 같았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뾰족하고 슬픈 것들을 ‘아무튼’ 느끼게 하는.

해석하려는 자세로 시를 읽는 것이 '시의 존재’ 만큼이나 무용하다는 것을 책기둥을 통해 조금 알아낸 것도 같다. 해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굳이 해석을 더해 의미 있고 완결된 이야기로 만들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꼭 그렇게 다물려지지는 않는 기묘한 이야기의 전개이다". 해설을 읽고 나서 목 부근까지 잠긴 셔츠 단춧구멍 하나쯤 푼 기분으로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암호 같은 시어들을 여전히 해독하고 싶은 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벽을 해명하는 데 일생을 거는 벽"이 되거나, "브래지어가 없는 F"가 되어버리는 체험을 이따금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코 아래 입술이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수상해 하기도 했고, "슬퍼하지 않은 것도 슬퍼한 것의 일부가 되는 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또 이따금 다른 이에게 느꼈던 마음이라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50억 배 확대해 보고야 마는 나쁜 마음"이었다는 슬픈 진실도 깨닫게 됐지만 동시에 저릿한 해방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제멋대로 고유명사도 되었다가 부사나 동사가 되어보기도 하면서 점점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쉽기만 했던 시집이다. 

이렇게 쓰고도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 글로는 좀처럼 정리될 것 같지 않다. 그 핑계 삼아 옆에 두고 오래오래 읽고 싶다. 

참 그러고 보니 내 애인도 뇌를 두고 떠났는데, 그는 알까. 서로의 비스킷 씹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헤어진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밧줄이었다는 것을.

우연히 트레바리를 알게 되고, 

수많은 모임 중에서도,

아주 주관적인 내 생각이지만,

핵인싸와 아싸의 무분별한 경계 사이에 놓인 '시밤'을 선택해 벌써 한 시즌이 지났다. 


대체 요즘 누가 시를 읽는다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시와 함께 살고 있다.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돈을 내고도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트레바리.

이런 신발 같은 경우가 있나 싶겠지만, 그러한 강제성이 나로 하여금

고민의 흔적이 배인 글을 쓰게 하고, 말보다 앞서 생각을 정리한 덕에

모임에서도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


또 시밤은 든든한 가이드 역할을 해주시는 클럽장(그것도 무려 김상혁 시인!!)님이 계시니,

돈은 더 든다. 아주 조금 더....신청할 때 마우스를 멈칫거리게 하는 정도.

하지만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들고 오는 생각의 무게는 그것보다 값어치 있다. 정말로.



1809시즌 9월 첫 모임에서는 


허수경의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김언의 「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을 다뤘고,


클럽장님의 가장 기억에 남는 말, "충분히, 마음껏 오독하시라."




아래는 기록용, 첫번째 독후감 --------------------------------------



‘누구도'와 ‘아무도'의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시 읽는 모임에 나가게 됐다고 말하자 그는 시집의 제목을 물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와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을 읽고 있다고 말해줬다. 집에 돌아가는 길, 제목을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워졌어야 했는데 나는 자못 심각해졌다. 


왜 ‘누구도'를 ‘아무도'라고 바꿔 말했을까. ‘누구도'라고 읽으면서 ‘아무도'라고 기억한 걸까. 대체 ‘누구도'와 ‘아무도'의 차이는 뭘까. 왜 시인은 ‘아무도'를 쓰지 않고 ‘누구도'를 선택했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이라고 하면 정말이지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일까.


두 시집이 비교를 위해 선정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동시에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비교를 하게 됐다. 각각의 시를 있는 그대로 읽으면 될 것인데 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보니 자꾸 그 사이의 뭔가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나 자신이 허수경 시인보다 김언 시인을 더 자주 찾았던 이유도 알게 될 것만 같았다. 


허수경 시인의 시들을 ‘누구'가 관통하고 있다면, 김언의 시들은 '아무'도 없이 내가 혼자 있다.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인 ‘누구'는 존재를 모르지만 타인 혹은 무엇이 있다. 반드시 존재한다. 

허수경의 시에서는 내가 누군가를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한다. 타인은 구체화되어 네가 되고 당신이 된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이지만, 그곳에서 누군가를 어쨌든 만나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듯이, 그리운 당신이 참 많이도 나와 결국 이름으로 남는다. 그래서 "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아파하고, 그런 이름들이 무엇이었는지" 계속 생각한다. 


반면,<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에서의 나는 대부분 혼자다. 타인이 있을 뻔했고, 있기도 했고, 있었을 수도 있고,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사라졌겠지만, 시적 화자는 그것들을 구체화된 대상으로(이름을 지어줄 누군가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아무'라는 부정칭 대명사는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이라고 특정할 때까지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는 혼자 있고", "아무도 없는 마을"이 생겨나고, 심지어 나의 존재도 부정하고 싶은 지경까지 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없어야 할 곳으로 가고 있다”거나 "내가 등장하지 않는 소설"도 만들어진다. 그러나 "결국 내가 문제라서, 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라지지도 않는다”.

사라지지 못한 내가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다. "누구라는 이름도 없이 무엇이라는 명명도 없이 나는 친구를 찾기"만 하고, "이름도 없이" 나의 세계로 들어온 것들을 명명할 "이름을 찾으면서도 나머지 모든 이름은 지운다". 시집 제목인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라는 구절이 담긴 <마음이>라는 시에서 단 한 번, 시집을 통틀어 정말이지 단 한 번, 이름을 가지게 된 마음이조차 타인으로부터, 너로부터(혹은 나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다. 


이 두 권의 시집은 내게 ‘누구도'와 ‘아무도'로 남았다. ‘누구도'는 그리운 당신이 되었고, ‘아무도'는 혼자 남은 나를 마주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가 김언의 시집을 더 많이 들춰보았던 것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작 시에는 답이 없는데 혼자 남은 그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를 많이 닮은 내가 잘 지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지금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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