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의 남산. 

우리의 게으름을 탓하고 미세먼지를 탓하며 

며칠 만에 올라간 아침 남산. 


7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여전히 큼지막한 달은 무엇.

알고 보니 전날 뜬 슈퍼문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렇게 뜨는 달은 참 오랜만이라고 엄마는 방방 뛰며 춤을 추었고,

내년에는 머슬 코리아인지를 나가겠다며 되도 않는 포즈를 취해 보였고,

그것이 너무 웃겨 하루만치 웃을 양을 다 써버린 아침. 








1월 17일의 남산.

남산타워 색깔은 초록. 보통의 대기질도 이젠 감사할 따름.  




엄마가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들을 만나고 왔다. 

둘레길을 걷는데 엄마가 대뜸,


"다들 나이 들어서 하는 걱정이라고는 건강 밖에 없어. 왜인 줄 알아?"


"나이 들면 건강 챙기는 게 제일 걱정이긴 하지. 아프면 잘 안 낫기도 하고."


"아니야. 어디 아파서 자식들한테 민폐라도 끼칠까 그게 걱정인 거야.  

치매도 이젠 흔하게 걸리잖아. 병 걸려서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한테 폐 끼칠까 봐 걱정인 거라고. 부모 마음은 다 그런가 봐."


막내딸인 엄마는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를 10년이나 모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병간호로 그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정말이지 가혹한 것이어서, 누구 하나는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형제들이 나몰라라 하고, 그냥 요양원에 모시라는 얘기를 들어도 엄마는 할머니를 끝까지 집에서 모셨다. 


그 세월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 

그 긴 시간 동안 할머니가 엄마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엄마, 내가 누구야? 응? 말해봐 봐"였다.


그렇게 부모 병간호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부모 입장에서 자신이 아프지 않기를, 자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니. 조금 억울한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 PT도 시켜주고, 남산도 올라오고, 같이 운동하는 거잖아. 건강 챙기자고"


더 잘하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고 '내가 있잖아' 식의 위로의 말이었는데,


엄마의 대답,

"야, 너나 잘해. 체력도 딸려서 지금 너만 헉헉대잖아. 이제는 무릎도 아프다 그러고, 아이고"


그녀는 나보다 강하다. 여러모로. 









김연수 작가의 여행 산문집 <언젠가, 아마도>에

 "남산타워가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세상이라니"라는 제목의 글에서 

남산타워 기둥 색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서울타워 색깔에 관한 이야기. 

남산타워의 기둥 색깔은 대기질에 따라 변한다. 


빨간색이면 나쁨

초록색이면 보통

파란색이면 좋음


"터 잡고 사는 땅의 꼴이 이렇다 보니 더욱 여행을 꿈꾸게 된다."


__45p,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마냥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작가는 여행을 꿈꾸고, 

나는 요 며칠 정말이지 기도하는 심정으로 매일 남산타워 기둥의 색이 파란색으로 바뀌기를 바랐다. 


그리고 오늘. 

잠깐 미세먼지가 주춤한 오늘.

체감온도 -12도라지만 그래도 오늘은 하늘도, 남산타워도 더없이 파랬으므로.

오랜만에 엄마도 나도 신났다. 


"세상이란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 내가 궁금한 건

인간이란 어디까지 긍정적일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지옥도 정겨워질 때까지가 아닐까." 


__ 115p,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남산을 내려오면서, 엄마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이놈의 세상이 어쩌려고 이러나 몰라." 


"그래도 미세먼지 덕분인지 때문인지 이런 날이 더 감사하게 느껴지잖아. 내일도 파란색이면 좋겠다, 엄마."


아, 나 조금은 긍정적인 인간인가 싶었는데. 

빌어먹을 내일 또 미세먼지라니.
















벌써 며칠째 남산을 못 올라가고 있다. 

무릎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당분간 운동하지 말라는 처방 아닌 처방.....


그러나 문제는 미세먼지 였....

오늘은 초미세먼지 평소 6배? 목이 근질근질하다. 


쉬려고 마음먹은 것과 예기치 않게 쉬는 것은 참 다른데

미세먼지 때문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으니 뭔가 억울하기까지 한 오늘. 



12월의 남산은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구기자 같은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도 했는데.


그립다 남산.

지겹다 미세먼지.






남산타워를 찍은 어제부로, 걷기 코스를 바꾸었다. 


가파르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코스지만,

그만큼 운동 다운 운동을 하는 느낌이 든다.


새로운 코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별안간 엄마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우리 이제 이렇게 해보자.

-뭘?

-마주치는 사람한테 인사하기.

-난 외국 나가면 그러는데, 한국에선 뭔가 겸연쩍어.

-엄만, 앞으로 그렇게 할 거야. 인사할 거야.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러고는 대여섯 명을 길에서 마주쳤다.

엄마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나도 뒤따라가며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안부 인사가 부담스럽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해주는 사람.

"안녕하세요"라고 답해주는 사람이 우리를 지나쳤다. 


-저 사람들도 아침에 인사받는 게 어색한 거야.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산을 내려올 때는 인사를 하지 않는 거다.


-엄마, 왜 인사 안 해.

-까먹었어.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엄마도 민망했나 싶었다. 


그러다가 집 근처 와서는,

슈퍼 문을 여는 직원에게 별안간 큰소리로 안부를 건네는 것이다.

직원이 당황한 듯(표정 어쩔....) 고개를 돌리며 얼떨결에 인사를 받는다.


-인사를 뭘 그렇게 크게 해. 

-수그리고 있어서 못 들을까 봐.

-동네 사람들 다 깨우겠네.


오늘 엄마가 안부를 건넨 사람들은 안녕한 하루를 보냈을까. 


앞으로도 엄마의 인사하기는 계속될까. 







아침 기온 -10도. 한파를 뚫고 가기에는 컨디션 난조였다. 

일을 끝내고 난 후에도 피곤을 가장한 게으름으로 드러누울뻔했지만,

결국 느지막이 남산에 올랐다. 


몇 개월 내내 가보자고 마음만 먹던 샛길이 있었는데, 

오늘은 방향을 틀어 그리로 올라갔더니, 

남산 둘레길로는 두 시간은 족히 걸릴 남산 타워를

20분 만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왜 이런 길을 이제 알았냐며 엄마와 아웅다웅. 

힙업이 제대로 될 것이라며 가파른 계단을 쉼 없이 올라갔더니,


드디어 남산 타워가 눈앞에. 

그리고 마주한 풍경. 




개인적으로 큰 이슈가 있었던 하루였는데, 

위로가 됐다. 

오늘 있었던 일 모두가 그저 견뎌낼 만한 것이었다고, 

믿어버리게 됐다.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대신

손잡고 이곳에 올라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들은 하나같이 힘들다 하는데,

누굴 먼저 데려와야 하나.  










미세먼지 때문에 하루 건너뛰고 나간 남산 둘레길.


"이것이 개나리인가 보다"하고,

어둠 속에서 앙상한 나뭇가지 끝을 더듬으며 엄마가 말하고,

나는 머릿속으로 봄 한가운데의 남산을 그려보며 걸었다. 

 

그렇게 봄을 세어가며 기다리는 일 마저도 즐거운. 





 

 



작년 9월부터 새벽에 일어나 엄마와 남산을 걷기 시작했다. 

남산이라고 해봐야 서울타워는 구경도 못하고, 

집 근처 둘레길을 걷는 것만 해도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미세먼지 심한 날과 코가 떨어질 것 같은 강추위 때만 빼고는 4개월을 줄곧 걸은 셈이다. 


잦은 과식으로 둘 다 드라마틱 한 체형 변화는 없지만(역시 다이어트는 식단 조절...)

다이어트 그 영원한 숙제와는 별개로 엄마와 나는 이제 거의 남산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는 남산을 걷지 않으면 왜인지 하루가 유독 길고 피곤하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아 좋다, 아 좋으네, 너무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엄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매일 아침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낄낄거리는 것이 꼭 남산 바보들 같지만, 

이따금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런 웃음은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올해에 계획한 것 중에 하나가 블로그를 꾸준히 하는 것인데,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라 그래도 그나마 매일 하는 것이 걷는 것이라 이것을 일기처럼 쓰다 보면,

오키나와 여행기도 책을 쓰는 일도 시를 읽는 일도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자연스레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걸으면서 보낸 시간들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지난 가을 남산은 참 예뻤는데, 계절의 변화도 같이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올해 남산에 몇번이나 올라갈 수 있을까.

미세먼지의 공습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남산 타워까지 가볼 날이 올까.

그나저나 살은 뺄 수 있을까.

엄마라는 사람을 더 알 수 있게 될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엄마가 더 이해하게 될까.


걷다 보면 알게 될지도.


.

.

.



오늘은 오후에 걸었다. 

엄마는 나를 낳고 가물치를 고와 마셨다는 것과

어릴 때 집에 때마다 끓여놓던 곰국을 정작 엄마는 싫어한다는 것.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될 줄 알았냐는 질문에,

"하여간 너는 신문지로 오리고 붙이고 뭘 그렇게 만들더라" 하면서

할아버지가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얘는 미술 시켜야겠다"라고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마의 기억에는 몰랐던 나의 어린 시절이 있어 듣다보면 어린 내가 보고 싶어진다. 

















이사 간다. 

셀프인테리어 하기로 했다. 


이사갈 집이 비어있으니, 우선 페인트를 바르기로 한다. 한다, 한다, 한다 하고 한 달이 지났다. 



< 셀프페인트 컬러 선정, 한 달간의 짧은 기록 >



1. 여기저기 눈품 팔아 팬톤 페인트가 무난하다는 결과를 얻음. 나름 공부한 게 있어 팬톤 자체가 친숙함


2. 그러다가 언니가 추천한 벤자민 무어 매장에 상담을 갔다. 너무너무 친절함! 컬러만 정했다면 당장 구입했을텐데. 

가기 전에 전체 인테리어 컬러를 그레이 톤앤톤으로 결정하고 갔지만, 어머 얘들아 해도해도 너무 많다....




3. 결국 결정을 못하고 집에 돌아와 밤마다 컬러 차트를 뒤적임. 

벤자민 무어는 인터넷으로 컬러 차트 보기가 좀 불편하다...컬러 비교가 좀 어렵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4,000여가지 컬러의 압박. 선택지가 너무 많아 더 힘들었다. 


4. 그즈음 외국 사는 친구가 자기 인테리어 할 때 참고했다고 사이트를 알려줌. apartmenttherapy.com


5. 그러다 녹색에 급 빠져서 그린을 찾는데 팬톤 페인트는 컬러 비교가 잘됨. 

자기가 고른 색 다섯 가지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


6. 아직 끊나지 않은 컬러 찾기. 매일 눈이 아파 눈물이 남. 언니 왈, "내 눈엔 다 똑같은데? 너무 알아도 병이다 병"

아, 괜히 미술했나봐...............


7. 일단 컬러 찾기 포기. 실크 벽지에는 프라이머를 발라야 한다고 해서 이것저것 페인트 부자재와 프라이머 4L 구입. 구입만 해놓음. 


그리고...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리고 여태 이 짓을....







바탕 화면에 수북히 쌓이도록 캡쳐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쯤되니 선택 장애인가, 컬러에 대한 고집인가. 나란 사람이 무척 궁금해짐. 


그리고 생각한다. 


아,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한가.


아, 이런 정성으로 공부를 했다면

 

그리고, 내가 원하는 녹색은 정녕 무엇인가!


푸른 빛이 과하게 돌지 않고, 쨍하지도 않으며, 명도가 낮아서 탁한 것은 싫고, 그러면서도 채도가 너무 높아 가볍지 않았으면 좋겠고,

집 전체의 포인트가 될 만한고, 심혈을 기울여 고른 회색들과 어울릴 그러한 녹색


.

.

.

인고의 시간 끝에 컬러를 정했다. Shady Glade!

이사갈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똥줄이 타서 골라야만 했다. 


오늘에서야 주문 완료하고 달뜬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컴온요!


오늘의 교훈 : 인생은 벼락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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