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의 남산.

남산타워 색깔은 초록. 보통의 대기질도 이젠 감사할 따름.  




엄마가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들을 만나고 왔다. 

둘레길을 걷는데 엄마가 대뜸,


"다들 나이 들어서 하는 걱정이라고는 건강 밖에 없어. 왜인 줄 알아?"


"나이 들면 건강 챙기는 게 제일 걱정이긴 하지. 아프면 잘 안 낫기도 하고."


"아니야. 어디 아파서 자식들한테 민폐라도 끼칠까 그게 걱정인 거야.  

치매도 이젠 흔하게 걸리잖아. 병 걸려서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한테 폐 끼칠까 봐 걱정인 거라고. 부모 마음은 다 그런가 봐."


막내딸인 엄마는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를 10년이나 모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병간호로 그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정말이지 가혹한 것이어서, 누구 하나는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형제들이 나몰라라 하고, 그냥 요양원에 모시라는 얘기를 들어도 엄마는 할머니를 끝까지 집에서 모셨다. 


그 세월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 

그 긴 시간 동안 할머니가 엄마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엄마, 내가 누구야? 응? 말해봐 봐"였다.


그렇게 부모 병간호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부모 입장에서 자신이 아프지 않기를, 자식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니. 조금 억울한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엄마 PT도 시켜주고, 남산도 올라오고, 같이 운동하는 거잖아. 건강 챙기자고"


더 잘하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고 '내가 있잖아' 식의 위로의 말이었는데,


엄마의 대답,

"야, 너나 잘해. 체력도 딸려서 지금 너만 헉헉대잖아. 이제는 무릎도 아프다 그러고, 아이고"


그녀는 나보다 강하다. 여러모로. 








벌써 며칠째 남산을 못 올라가고 있다. 

무릎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당분간 운동하지 말라는 처방 아닌 처방.....


그러나 문제는 미세먼지 였....

오늘은 초미세먼지 평소 6배? 목이 근질근질하다. 


쉬려고 마음먹은 것과 예기치 않게 쉬는 것은 참 다른데

미세먼지 때문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으니 뭔가 억울하기까지 한 오늘. 



12월의 남산은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구기자 같은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도 했는데.


그립다 남산.

지겹다 미세먼지.






아침 기온 -10도. 한파를 뚫고 가기에는 컨디션 난조였다. 

일을 끝내고 난 후에도 피곤을 가장한 게으름으로 드러누울뻔했지만,

결국 느지막이 남산에 올랐다. 


몇 개월 내내 가보자고 마음만 먹던 샛길이 있었는데, 

오늘은 방향을 틀어 그리로 올라갔더니, 

남산 둘레길로는 두 시간은 족히 걸릴 남산 타워를

20분 만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왜 이런 길을 이제 알았냐며 엄마와 아웅다웅. 

힙업이 제대로 될 것이라며 가파른 계단을 쉼 없이 올라갔더니,


드디어 남산 타워가 눈앞에. 

그리고 마주한 풍경. 




개인적으로 큰 이슈가 있었던 하루였는데, 

위로가 됐다. 

오늘 있었던 일 모두가 그저 견뎌낼 만한 것이었다고, 

믿어버리게 됐다.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대신

손잡고 이곳에 올라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친구들은 하나같이 힘들다 하는데,

누굴 먼저 데려와야 하나.  










미세먼지 때문에 하루 건너뛰고 나간 남산 둘레길.


"이것이 개나리인가 보다"하고,

어둠 속에서 앙상한 나뭇가지 끝을 더듬으며 엄마가 말하고,

나는 머릿속으로 봄 한가운데의 남산을 그려보며 걸었다. 

 

그렇게 봄을 세어가며 기다리는 일 마저도 즐거운. 





 

 



작년 9월부터 새벽에 일어나 엄마와 남산을 걷기 시작했다. 

남산이라고 해봐야 서울타워는 구경도 못하고, 

집 근처 둘레길을 걷는 것만 해도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미세먼지 심한 날과 코가 떨어질 것 같은 강추위 때만 빼고는 4개월을 줄곧 걸은 셈이다. 


잦은 과식으로 둘 다 드라마틱 한 체형 변화는 없지만(역시 다이어트는 식단 조절...)

다이어트 그 영원한 숙제와는 별개로 엄마와 나는 이제 거의 남산 중독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는 남산을 걷지 않으면 왜인지 하루가 유독 길고 피곤하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아 좋다, 아 좋으네, 너무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엄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매일 아침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낄낄거리는 것이 꼭 남산 바보들 같지만, 

이따금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런 웃음은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올해에 계획한 것 중에 하나가 블로그를 꾸준히 하는 것인데,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라 그래도 그나마 매일 하는 것이 걷는 것이라 이것을 일기처럼 쓰다 보면,

오키나와 여행기도 책을 쓰는 일도 시를 읽는 일도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자연스레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걸으면서 보낸 시간들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지난 가을 남산은 참 예뻤는데, 계절의 변화도 같이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올해 남산에 몇번이나 올라갈 수 있을까.

미세먼지의 공습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남산 타워까지 가볼 날이 올까.

그나저나 살은 뺄 수 있을까.

엄마라는 사람을 더 알 수 있게 될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엄마가 더 이해하게 될까.


걷다 보면 알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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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후에 걸었다. 

엄마는 나를 낳고 가물치를 고와 마셨다는 것과

어릴 때 집에 때마다 끓여놓던 곰국을 정작 엄마는 싫어한다는 것.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될 줄 알았냐는 질문에,

"하여간 너는 신문지로 오리고 붙이고 뭘 그렇게 만들더라" 하면서

할아버지가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얘는 미술 시켜야겠다"라고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엄마의 기억에는 몰랐던 나의 어린 시절이 있어 듣다보면 어린 내가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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