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트레바리를 알게 되고, 

수많은 모임 중에서도,

아주 주관적인 내 생각이지만,

핵인싸와 아싸의 무분별한 경계 사이에 놓인 '시밤'을 선택해 벌써 한 시즌이 지났다. 


대체 요즘 누가 시를 읽는다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시와 함께 살고 있다.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돈을 내고도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트레바리.

이런 신발 같은 경우가 있나 싶겠지만, 그러한 강제성이 나로 하여금

고민의 흔적이 배인 글을 쓰게 하고, 말보다 앞서 생각을 정리한 덕에

모임에서도 다른 이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


또 시밤은 든든한 가이드 역할을 해주시는 클럽장(그것도 무려 김상혁 시인!!)님이 계시니,

돈은 더 든다. 아주 조금 더....신청할 때 마우스를 멈칫거리게 하는 정도.

하지만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들고 오는 생각의 무게는 그것보다 값어치 있다. 정말로.



1809시즌 9월 첫 모임에서는 


허수경의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김언의 「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을 다뤘고,


클럽장님의 가장 기억에 남는 말, "충분히, 마음껏 오독하시라."




아래는 기록용, 첫번째 독후감 --------------------------------------



‘누구도'와 ‘아무도'의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시 읽는 모임에 나가게 됐다고 말하자 그는 시집의 제목을 물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와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을 읽고 있다고 말해줬다. 집에 돌아가는 길, 제목을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워졌어야 했는데 나는 자못 심각해졌다. 


왜 ‘누구도'를 ‘아무도'라고 바꿔 말했을까. ‘누구도'라고 읽으면서 ‘아무도'라고 기억한 걸까. 대체 ‘누구도'와 ‘아무도'의 차이는 뭘까. 왜 시인은 ‘아무도'를 쓰지 않고 ‘누구도'를 선택했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이라고 하면 정말이지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일까.


두 시집이 비교를 위해 선정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동시에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비교를 하게 됐다. 각각의 시를 있는 그대로 읽으면 될 것인데 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보니 자꾸 그 사이의 뭔가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나 자신이 허수경 시인보다 김언 시인을 더 자주 찾았던 이유도 알게 될 것만 같았다. 


허수경 시인의 시들을 ‘누구'가 관통하고 있다면, 김언의 시들은 '아무'도 없이 내가 혼자 있다.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인 ‘누구'는 존재를 모르지만 타인 혹은 무엇이 있다. 반드시 존재한다. 

허수경의 시에서는 내가 누군가를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한다. 타인은 구체화되어 네가 되고 당신이 된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이지만, 그곳에서 누군가를 어쨌든 만나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듯이, 그리운 당신이 참 많이도 나와 결국 이름으로 남는다. 그래서 "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 아파하고, 그런 이름들이 무엇이었는지" 계속 생각한다. 


반면,<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에서의 나는 대부분 혼자다. 타인이 있을 뻔했고, 있기도 했고, 있었을 수도 있고,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사라졌겠지만, 시적 화자는 그것들을 구체화된 대상으로(이름을 지어줄 누군가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아무'라는 부정칭 대명사는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이라고 특정할 때까지 그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는 혼자 있고", "아무도 없는 마을"이 생겨나고, 심지어 나의 존재도 부정하고 싶은 지경까지 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없어야 할 곳으로 가고 있다”거나 "내가 등장하지 않는 소설"도 만들어진다. 그러나 "결국 내가 문제라서, 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사라지지도 않는다”.

사라지지 못한 내가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다. "누구라는 이름도 없이 무엇이라는 명명도 없이 나는 친구를 찾기"만 하고, "이름도 없이" 나의 세계로 들어온 것들을 명명할 "이름을 찾으면서도 나머지 모든 이름은 지운다". 시집 제목인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라는 구절이 담긴 <마음이>라는 시에서 단 한 번, 시집을 통틀어 정말이지 단 한 번, 이름을 가지게 된 마음이조차 타인으로부터, 너로부터(혹은 나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다. 


이 두 권의 시집은 내게 ‘누구도'와 ‘아무도'로 남았다. ‘누구도'는 그리운 당신이 되었고, ‘아무도'는 혼자 남은 나를 마주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가 김언의 시집을 더 많이 들춰보았던 것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작 시에는 답이 없는데 혼자 남은 그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를 많이 닮은 내가 잘 지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지금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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